도덕경, 1장과 2장 사이 사유



01. 
왜 시작되었는지 기억할 수 없지만, 나는 아내가 운전하는 차가 서울과 순천을 오가는 사이에 노자 도덕경 1장을 머리 속에서 계속 읽고 있었다. 아마도 해결되지 않은 어떤 단어가 되살아온 탓이 아닐까? 상도(常道)와 상명(常名). 만약 도를 말로 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런 건 진짜 도(常道)가 아니라면 도대체 상명은 뭘 말하는 걸까? 상도와 상명은 어떤 관계일까? 대부분의 해석이 道可道 부분만 열심히 설명하고, 名可名 부분은 그냥 대충 넘겨버린다. 나는 답답한데, 이걸 쉽게 풀어서 설명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뭐라고 설명은 했겠지만, 솔직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답답함이 다시금 살아왔다고, 대충 그렇게 정리한다. 


02. 
어떤 사람은 “道可道, 非常道”가 도덕경의 핵심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1장 전체의 구성을 보면 그렇게 보기 힘든 면이 있다. 도와 명에 대해 아니다는 부정적인 내용을 제시한 다음, 무명과 유명을 이야기하고, 맨 마지막에서 이 둘을 묶어 하나로 정리하는데, 구체적으로 내용이 제시되는 무명 이하가 1장의 핵심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공자의 학이시습(學而時習)과는 무게감이 다르고, 천지와 만물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일종의 우주론으로 볼 수도 있는 이 장의 핵심이 첫 문장에 포함되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1장의 첫문장을 도입부라고 보고, 기존 입장에 대한 거부 이후 본 내용으로 들어가는 구조라고 정리해보면, 동일한 전개방식이 2장에서도 나타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03. 
1장을 읽기 위해 먼저 2장을 읽어본다. 2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알고 있는게 사실 추악한 것이다? 그런데 알고보면 있음과 없음은 서로를 낳는다(有無相生) 등등? 그런데 이 부분을 잘 읽다보면 조금 꼬이는 부분이 있다. 있음과 없음이 서로를 낳는다는 말은 있음이 없음이라는 말은 아니다. 즉 있음과 없음은 질적으로 다르다는 말이다. 그럼 아름다움(美)과 추함(惡)은? 사람에게 아름다운 것이 다른 동물에게는 추한 것일 수 있다는, 장자 식의 이야기가 통상 이 해석에 적용되고 있는데, 이게 맞나 싶다. 美=惡인데, 有≠無라는 말인가?


04. 
물론 美惡과 有無를 다른 차원으로 볼 수도 있다. 사람들이 뭔가를 구분하는 개념들이 취약하고 제한점이 많기 때문에, 상대적 개념을 포괄하는 입장에서 봐야한다, 로 풀 수도 있지만, ‘당신들이 아름다움으로 알고 있는게 사실 추함이다’라고 말하는, 해석하는 방식에는 뭔가 빠져있다. 당신은 모르지만, 나는 잘 알아.. 이런 식인데 여기엔 논리도 뭣도 없다. 이건 그냥 꼰대다. 나는 맞고 당신은 틀렸다. 장자를 끌어들이지 않고, 이 안에서 자연스러운 도입부로 만들기에는, 따라서 다음 문장에 故(따라서)라는 인과로 연결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나는 잘 알고 있으니까, 뭘 모르는 당신들은 내 이야기를 들어? 이런 전개란 말인가? 너무 억지스럽지 않은가?


05. 
조금 더 도입부다운 가벼운 전개방식은 무엇이 있을까? 사람들이 대립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개념들이 알고보면 만물이 끊임없이 만들어지기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하는 상보적 쌍이다. 인간적인 대립쌍은 무의미하다, 인간적인 관점이 아닌 만물 생성의 관점에서 다르게 보자는 말을 하고 싶은데.. 어떤 도입부가 좋을까? 그런 개념적 대립이 틀렸다고 강하게 말해야할까? 그건 아니라는게 나의 입장이고, 그 입장은 결국 노자는 꼰대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과 통한다. 그럼 어떻게 ‘가볍게’ 꼰대를 벗어날까? 나의 방식은 이(已)에 시간적인 요소를 추가하는 식이다.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알고 있는 것이 지나고보면 추한 것이 되기도 한다. 모두가 선하다고 하는 것이 알고보면 악한 것이 되기도 한다." 당신들이 사태를 판단했던 기준이 시간이 지나거나 사태를 조금 더 정확하게 파악하면 역전되는 상황은 정말 흔하지 않은가? 우리의 판단은 그렇게 단기적이고 제한적인 경우가 많지 않은가? '조금 폭넓게 사태를 보자'는 중간 연결항이 그렇게 숨어 들어간다.


06. 
2장의 도입부는 간단하게 들어간다. 물론 나는 알고 당신은 모른다는 자세를 취할 것인지 아닌지에 따라 무게감은 조금 달라지지만, 결국 하고싶은 이야기는 故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렇다면 2장의 도입부를 가볍게 처리하는 방식, 문제제기 차원에서 부담없이 끌어들이는 수준으로 1장의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를 해석해보면 어떨까? 어차피 1장에서도 하고 싶은 이야기는, 2장과는 수준이 다른, 조금 크고 넓은 이야기이지만 無名 이후로 나오는데, 1장에서도 가볍게 갈 수는 없을까? 


07. 
가볍게 가기 위해서 첫번째로 할 일은 도(道)와 명(名)의 수준을 맞추는 일이다. 도에 걸린 무게를 줄여야 한다. 그저 '도를 아십니까?'라고 묻는 수준으로 말이다. 그렇게 보면 도는 심각하지 않다. 그리고 왜 도 다음에 명이 나오는지 명확해야 한다. 아니 화자에게 도와 명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었다. 그 연결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그럼 도에서부터 시작하자. 도는 그저 도일 뿐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알고 있는 다양한 도의 하나일 뿐이다. 수없이 많은 도 중의 하나. 당신이 인정하는 그 하나의 도(一道). 도는 애초에 하나가 아니다. 그렇게 쓰이고 있었다. 그럼 명은 도와 무슨 관계인가? 명을 도와 연결한다면? 명은 도를 구성하기 위한 변별적 개념들, 대상들로 볼 수 없을까? 만약 군자의 도를 말하려 한다면, 거기에는 군자와 소인이 있어여 하고, 왕과 신하가 있어야 한다. 주체별의 의무를 정해야 한다. 이런 하나하나의 구분이 바로 명이다. 그럼 도와 명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도는 하나의 체계이고 명은 그 체계를 구성하는 핵심 개념들이다. 


08. 
이제 해결해야할 단어는 상(常)이다. 상도(常道)를 영원한 진리라고 해석을 해버리면 뭔가가 꼬이는 느낌이다. 알 수 없는 이질감? 물론 내용적으로 노자는 그 전에는 들어본 적이 없는 새로운 도를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바로 ‘상도’를 말하면서 딱딱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을까? 어법에는 어긋날 수도 있지만, 비상(非常)에 집중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상은 현재보다는 긴 시간적 관점을 요구한다. 과거를 조금 더 넓게 돌아보기를 권한다. 도의 성장과 소멸을 살펴보게 만든다. 노자 당시는 수 없이 많은 도들이 명멸하던 시점이 아니었을까? 물론 백성의 입장에서 그런 명멸의 역사를 관조할 수 있는 가능성은 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말을 건네볼 수는 있다. 그렇게 이(已)와는 다르지만, 상(常)을 통해 자연스럽게 시간을 도입하는 방식을 고민해본다. “사람들이 믿고 따르던 도는 모두 버려진다. 도를 구성하는 개념도 잊혀진다. 하지만 나는 사라지지 않는 하나의 도를 말하고 싶다.”  


09.
모든 길이 포함된 하나의 길을 말하기 위해서는 차원이 달라져야 한다. 다양한 길들에 또 하나의 길을 더하는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만물을 말하지 않고, 천지의 시작(天地之始)을 먼저 말해야 한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모든 도는 인간을 포함한 만물과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다른 길, 하나의 큰 길은 만물을 포괄하는 우주론적 관점에서만 가능해진다. 그렇게 때문에 천지의 시작을 이야기하게 된다. 물론 천지의 시작에 대해 노자가 얼마나 구체적인 이미지를 가졌는지는 알 수 없다. 막연한 느낌정도일 것이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본 적도 없으니 말 할 수 없는 대상이다. 그런데 노자는 씩씩하게 그건 무명이다, 변별할 수는 없지만,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만물로 가득한 세상, 다분히 고통스러울 이 세상만을 말하지만, 그 세상 내에서만 통용되는 도를 말하지만, 나(노자)는 그 세상을 한 부분으로 하는 더 큰 도, 우주론적인 도를 말하고 싶고,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기 어디에도 망설임은 없다. 언어화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대한 두려움은 없다. 


09a.
노자에서 여성적인 이미지가 많이 등장하는 것은 그가 생각하는 자연이 생명의 끊임없는 생성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생성을 책임지는 것은 자연스럽게 남성이 아닌 여성이다. 그리고 생명의 시작과 끝을 천지에 적용할 경우 천지 자체도 생성과 소멸을 할 수 있다는 발상이 가능해진다. 물론 우리는 한 번도 천지의 소멸을 본 적이 없다. 아니 우리는 발달한 기술 덕분에 천체의 생성과 소멸에 대해 알고 있다. 그리고 우주의 창조에 대한 이론 또한 가지고 있다. 그의 논리를 과격하게 밀고 나가서, 천지 자체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고 볼 수도 있는데, 흥미있는 것은 천지의 시작을 이야기할 때는 여성적 이미지를 가져오고, 만물을 지속적으로 생성해내는 힘을 높게 평가하지만, 그 천지를 어머니처럼 의인화하거나, 따뜻한 특성을 가져오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천지가 어머니같다, 도가 그런 성격이 있다고 말하지만, 거기에서 흔히 연상하는 모성으로 나아가지 않는 점은 특이하다.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고 과감하게 말을 한다. 천지에서 뭔가를 기대하지 말라는 말이다. 인간에 대한 배려를 포기하게 한다. 


10. 
노자는 말을 아끼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인간세상의 관찰자이면서 동시에 자연의 관찰자이기도 하다. 꼼꼼하게 자연의 항상성, 생산력을 관찰하고 이를 인간세상에 적용한다. 자연에 대한 집요한 상상력이 새로운 개념 생산의 원천이 된다. 인간의 언어와 개념이 가지는 한계를 중간중간에 표현하기도 하지만, 과연 도의 전달 가능성, 언어적 장애물이 1장의 도입부에서 이야기될만큼 중요한 이슈일까? 그건 아니다. 그는 이미 무명(無名) 이하에서 자신의 우주론을 자신있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할 수 있는 도는 불변의 도가 아니다? 아니다. 나는 나의 도를 말할 수 있다. 잘 들어봐라. 나는 지치지 않고 말할 수 있다. 들어보면 어렵지 않다. 단지 그동안 익숙했던 관점을 버리면 된다. 그러면 충분하다.


11.
황건적의 난과 도교의 한 갈래인 태평교의 연관성을 이야기하면서 노자 도덕경을 민중의 입장에서, 체제도피적이거나 순응적인 관점이 아닌 혁명주체의 텍스트라는 입장에서 다시 읽자는 의견이 있다. 이런 의견은 도덕경 내에서 현실 비판적인 해석의 폭을 넓히기도 한다. 그런데 더 혁명적인 시각은 바로 사람들이 세상 만물(萬物)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천지의 시작(天地之始)을 말하는 관점이 아닐까? 내가 살고 있는 가장 큰 틀이라고 생각했던 천지에 시작이 있다? 그리고 그 시작은 특정한 형태의 종말을 맞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면? 종교적 사유의 가장 큰 특성의 하나는 인간이 현재 살고 있는 세계를 상대화하는 관점의 도입일 것이다. 한 번 이렇게 특정한 관점이 도입되면, 사람은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이런 불가역성이 종교적 사유의 힘이고, 혁명으로 가는 출발점이 된다. 혁명은 기존 체제를 뒤집어보자는 전복적인 방향으로 움직일 수도 있지만, 기존 사유를 뒤집어 다시는 뒤돌아갈 수 없는 길을 만드는 곳에서도 성립한다. 물론 중국의 역사는 이런 혁명적 에너지를 순화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역사로 볼 수 있다. 또한 음양이라는 가장 포괄적인 개념 내에서 실질적인 대립을 해소했던, 미망의 역사로도 볼 수 있다. 




1장.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
此兩者, 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2장.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是以聖人,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不居.
夫唯不居, 是以不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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